양경종 이야기 |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2차대전 노르망디에서 발견된 한국인 포로 양경종의 기구한 운명을 통해 본 전쟁의 참상과 개인의 비극. 일본군·소련군·독일군을 거친 한 우리 청년의 이야기
금철영's avatar
Aug 03, 2025
양경종 이야기 |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노르망디에서 발견된 한국인, 양경종의 기구한 운명

영국의 뛰어난 전쟁사가이면서 작가인 앤서니 비버의 걸작 《제2차 세계대전》의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를 침공했을 때 한 젊은 병사가 미군 공수부대에 투항했다. 미군이 투항 당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던 그 병사는 한국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양경종이었다. (중략)...6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2차대전의 와중에 일본군, 소련군, 독일군에 차례로 징집되어 의도치 않게 베테랑 군인이 되어버린 양경종은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양경종은 평범한 사람이 무시무시한 역사적 폭력 앞에 얼마나 무력해지는가를 강렬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앤서니 비버에 따르면 양경종은 일제 식민지 조선의 평범한 젊은이로 18살에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앤서니 비버가 어떻게 자료를 수집했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양경종이란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과연 실존했던 한국인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되었든 양경종이 진짜 한국인인가란 논쟁과는 별개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미군 중위가 독일군 '동방대대' 출신의 포로들을 심문하면서 한국 출신의 포로 4명의 존재를 기록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앤서니 비버의 책도 이 기록을 토대로 한 것으로 보인다.

할힌골 전투에서 시작된 양경종의 비극

일단 진위여부를 떠나 비버의 명저 《2차 세계대전》의 첫 장을 장식한 '양경종의 전쟁'을 상상력을 가미해 되돌아보면 이렇다.

일본 관동군에 소속된 그는 '노몬한 전투'에 참전한다. '할힌골 전투'로도 불리던 그 싸움은 1939년 중국과 몽골 접경 지대에서 소련군과 일본 관동군 사이에 일어났다. 전투 전 관동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몽골 접경까지 진출하는데 거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맞닥뜨릴 소련군은 허수아비라고 생각했다. 소련군의 변신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다. 관동군의 이 근거없는 자신감은 무모한 선제공격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상대는 당시 소련군의 명장 주코프의 지휘하에 있던 극동군 기갑사단이었다. 관동군은 중국군을 상대할 때처럼 초반에 공군력의 우위로 기선 장악에 나섰다. 대규모 공중전과 지상 활주로 전투기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었고 일본의 판정승으로 끝날 듯했다.

관동군의 궤멸적 패배와 전략적 여파

하지만 육지에선 이런 공중전의 우위가 이어지지 못했다. 관동군은 정신력만 믿고 화염병을 들고 돌격해 들어왔다. 처음엔 효과가 있는 듯했다. 그러나 기갑전력에서의 압도적 차이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긴 힘들다.

결과는 관동군의 참패였다. 고전적 전술을 답습했던 관동군은 변화하는 전장에 대응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관동군 수뇌부의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지휘능력도 문제였다.

이 할힌골 전투에서의 궤멸적 패배로 일본군은 이후 극동 지역에서 소련군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해 들어갔을 당시 독일은 소련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동맹국인 일본에게 소련 동쪽에서 협공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할힌골 전투에서의 쓰라린 패배를 기억했던 일본군은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소련은 독일의 침공으로 전선이 계속 밀리는 상황에서도 동쪽으로 병력을 분산하지 않고 서쪽의 독일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만약 이때 일본군이 강력하게 극동에서 소련을 침공해 들어갔다면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에서 독일의 진격을 저지하고 반격에 나설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동쪽에서 일본군의 침공 가능성이 적어지자 소련군은 할힌골 전투를 지휘했던 명장 주코프를 서부 전선에 투입해 독일군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이 감히 소련 영토로 침공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만든 '전술적 승리의 전략적 귀결'이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할힌골 전투는 2차대전의 향방을 가르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던 셈이다.

강제노역에 시달린 관동군 포로들

관동군은 당시 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패배했지만 소련군에게 많은 포로도 남겼다. 이 포로들은 온갖 고초를 견뎌야 했다. 그 중에는 양경종 같이 한반도에서 끌려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엄청난 강제노역을 감당해야 했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지금껏 남아있는 대형 석조건물들 가운데 관동군 포로들의 손을 거친 것이 적지 않다.

나는 2011년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몽골 수도를 방문하면서 그들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 울란바토르를 방문하면서 눈에 띄는 대형 건축물들의 기원을 물으면 누구라도 당시 일본군 포로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앤서니 비버의 책을 읽기 전이어서 그 포로들 가운데 양경종 같은 한국인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또 '남의 전쟁에 뛰어든 그들'의 비극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으리란 생각은 결코 하지 못했다.

전쟁에 휩쓸리는 개인들의 기구한 운명...
국가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1942년의 소련군은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서 있었다. 나치 독일의 전격작전으로 전선에서 계속 밀리고 있었고, 연이은 패전으로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다급해진 소련 군부는 일본군 포로들 가운데 일부를 붉은 군대의 군복을 입혀 전선에 투입했다. 양경종은 이제 독일군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격전이 펼쳐진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싸우다 이번엔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의 포로수용소로 옮겨진 양경종의 기구한 운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독일 역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이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기에는 병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포로들에게 독일군복을 입혔다. 양경종은 이번엔 독일군이 되었다.

독일말을 알아들을 리 만무했지만 하사관의 고함소리를 따라 본능적으로 움직이다 보니 명령과 지시를 이행하는데 문제가 없는 베테랑 독일병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노르망디에 배치되었다.

노르망디에서 맞은 양경종의 마지막 전투

1944년 6월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이 펼쳐질 때 양경종은 노르망디의 독일군 부대 벙커에서 연합군의 엄청난 폭격을 견뎌내야 했다. 몽골과 중국 접경에서, 우크라이나 전선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엄청난 굉음이었다. 고막이 터질 듯한 폭음이 계속되었지만 그는 버티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양경종이 실제 인물이라면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이 기구한 운명의 한국 청년은 영국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간 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 1992년 사망했다고 앤서니 비버는 기술했다.

한반도에서 일제가 물러가고 해방이 되었지만 그는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리고 양경종에 대한 진실공방은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국내에선 양경종을 모티브로 한 소설과 영화까지 나왔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에 대해 굳이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할 근거도 없다.

독일군 '동방대대'의 비극적 운명

독일군 '동방대대'는 독일군이 소련군 포로 가운데 소련정부와 공산주의에 적대감을 갖고 있는 자들을 추려내 구성한 부대다. 연합군에 포로로 잡힌 '동방대대' 병력 가운데 상당수는 전후 연합군과 소련군과의 비밀 협정을 통해 소련에 강제 송환되어 처형되거나 장기 유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송환된 이들 가운데 '한국인 출신'들도 있다면 그들의 비극은 양경종처럼 노르망디에서 막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은 이렇듯 누군가를 기막힌 운명의 장난 속으로 밀어넣을 수 있다.

트로츠키는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10월 혁명의 주역이자 '붉은 군대'의 창시자다.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추방되었다가 멕시코에서 암살되면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남긴 이 말은 아직도 도처에서 회자된다.

전쟁 속에 휩쓸리는 기구한 운명의 개인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은 마땅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주권국가의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국가의 '전시동원'을 피해갈 길이 없다. 그런만큼 전쟁에 대해 신중히 생각하고, 대비하고, 또 대응해야 하는 것은 정치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다.

대한민국이 놓친 기회들

해방이 된 이후에도, 또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대한민국은 양경종처럼 여러 전선으로 끌려다녀야 했던 이 땅의 청년들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마땅히 해야 할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 당시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그들의 귀환은 이뤄져야 하는 일이었다. 나라를 잃고 명분없는 전쟁에서 싸워야 했던 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신생 대한민국은 끝까지 그들을 제대로 찾지 않았다. 아니 일본에 학병으로 끌려간 우리 청년들의 명단을 내놓으라는 요구조차 당당히 하지 못했다.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자신의 뜻에 반해 합사되어 있는 한반도의 넋들이 반드시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고민하고 노력해야 했지 않을까.

6.25전쟁에 나가 싸웠던 국군 장병 가운데 상당수가 여전히 생사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것도 어쩌면 대한민국 정부가 첫 단추를 잘못 꿰었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이 조국을 위해 또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다가 전사하더라도 조국이 자신의 시신만큼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해준다는 믿음이 없다면 과연 온 마음을 다해 싸울 수 있겠는가 반문해 본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미국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

미국 국방부 산하 기관 DPAA(Defense POW/MIA Accounting Agency) 즉, '전쟁포로 실종자 확인국'은 해외 도처에서 전투 도중 사망하거나 포로가 된 군인들의 신원을 확인해 유해를 발굴해 고향에 안장하거나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공식 기구다.

2차대전 당시 개별 작전부대 단위로 진행되던 업무를 1973년부터 체계적으로 진행하도록 별도 부대를 만들면서 확대 개편되어 오늘날의 DPAA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와이에 본부가 있는 DPAA의 모토는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Until They are Home)'이다. DPAA는 형식상 임무가 완수되면 해체되는 임무부대 성격이지만 등록된 실종자 유해가 남김없이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절대 해체될 수 없는 부대다.

DPAA의 끈질긴 노력과 성과

하지만 미군 유해가 묻혀있는 곳은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고 지금 그 나라와 사이가 안 좋다면 발굴하기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DPAA는 포기하지 않고 접촉한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지 않는다.

2018년 6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싱가포르에서 회담을 한 뒤 미국과 북한간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자 DPAA가 발빠르게 나서 6.25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던 장진호 등 북한내 주요 전투지역으로 요원들을 급파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 1일 미군 전사자 유해가 담긴 상자 55개가 하와이 미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그 현장에서 마이크 펜스 당시 미국 부통령이 예우를 갖춰 유해로 돌아온 미군들을 맞이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에 대한 존중과 예우는 군인들의 사기와 정신력에도 직결된다. 내가 전장에서 싸우다 죽더라도 나의 시신을 국가가 수습해줄 것이라는 믿음, 내가 싸우다 포로로 잡혀도 국가가 구해줄 것이란 믿음, 고국에 남은 가족들을 국가가 위로하고 지원해줄 것이란 믿음은 병사들을 강하게 만든다. DPAA의 활발한 활동은 미국이 여전히 세계 강대국으로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외교 안보 역량이 부족하면 재앙을 피하지 못한다

어느 나라의 지도자가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바탕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국익이 크게 훼손되는 것은 물론 그 나라 국민들은 원하지 않는 전쟁에 휩쓸리게 될 수 있다. 더구나 외교안보에 대한 식견이 부족한 지도층이 다수를 차지하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라면 불가피하게 전쟁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무리 군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용감히 싸운다 하더라도 말이다.

한 나라에서 외교안보를 책임지는 사람들은 늘 최악을 가정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최악의 상태로 가지 않게 미리 대응하는 것이다.

손자병법의 4가지 전쟁 대응 전략

손자병법에서는 전쟁을 염두에 둔 4가지 단계를 언급했다. 손자는 가급적 전쟁을 피하는 것이 좋지만 전쟁을 불가피하게 고려해야 한다면 다음과 같은 최상책에서 최하책까지 4가지 대응책이 있다고 얘기했다.

첫 번째 상책: 벌모(伐謨)

전쟁을 마주하는 첫 번째 상책으로 '벌모(伐謀)'를 꼽았다. 즉 상대의 전쟁 도발 의지와 전략을 초반에 분쇄하는 것으로, 최상책에 속한다. 감히 도발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전쟁수행의지를 꺾어서 전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란 얘기다.

두 번째 차선책: 벌교(伐交)

그 다음 차선책으로 '벌교(伐交)'를 꼽았다. 즉 상대방의 외교 군사적 우군과 동맹을 없애고 고립시키는 것이다. 배후에서 다른 국가의 지원없이 전쟁을 하게 된다면 상대방은 심한 압박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벌병(伐兵)

그 다음이 '벌병(伐兵)' 즉 적의 무력을 제압하는 것이다. 이는 완벽한 실전 준비와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실전과 같은 훈련을 통해서 강군을 육성하는 기본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이 단계부터는 상대방은 물론 아군 진영도 피를 흘리게 된다.

네 번째 하책: 공성(攻城)

네 번째가 가장 순위가 낮은 하책으로 '공성(攻城)'이다. 즉 성벽위에 버티는 강한 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에 돌입하는 것이 가장 힘들고 나의 피해 역시 극심해지는 단계라는 얘기다.

영화 속에서 전개되는 수많은 공성전을 보면 공격하는 병사들은 성위에서 떨어지는 불화살과 돌맹이, 뜨거운 기름을 뒤집어 쓰며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사다리위를 기어오른다.

어렵사리 승리를 거두고 기진맥진해지면 옆에서 팔장끼고 있던 이웃나라가 침략해 올 수도 있다. 전쟁을 염두에 둔 손자병법의 4가지 대응에 있어 '공성'까지 가도록 방치한다면 외교 안보 역량은 무능하다고 볼 수 있다. 국가적으로는 재앙인 것이다.

고대 레욱트라 전투에서 배우는 교훈

고대 스파르타와 테베, 이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는 막강한 스파르타의 방진 대형을 좌익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사선대형'으로 무너뜨렸다. 병력수가 스파르타에 비해 크게 적었음에도 테베는 좌익에 병력을 집중해 먼저 스파르타의 한쪽 측면을 와해시켰다.

반면 테베 중앙과 우익에 배치된 적은 병력들은 좌익에 비해 상대적으로 천천히 진군했다. 스파르타 입장에서 본다면 오른쪽에선 테베군이 빠른 속도로 강습해 자신들의 대형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왼쪽에선 천천히 다가오는 적군을 기다려야 했던 상황. 이렇게 되면 스파르타군은 무너져가는 아군의 대형쪽으로 이동해 도울 수 없게 된다.

결국 스파르타는 무너진 측면에서 쇄도하는 테베군에 전체 병력이 포위되면서 패배하고 말았다.

전술적 승리가 전략적 패배로

스파르타는 서양 고대의 세계대전, 즉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라이벌 아테네를 꺾은 당시 패권국가였다. 그러나 정상에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패권을 신흥 강국 테베에게 넘겨줘야 했다.

하지만 테베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된 틈을 타 다른 국가들이 도전해오고 결국 테베도 무너지게 된 것이다. 승리에 도취되어 국력을 정비하고 강화하지 못한 탓이다.

레욱트라 전투가 테베에게 ‘빛나는 승리’였을지는 모르지만, 손자병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의 힘도 크게 소진하는 방식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고, 결국 그 여파로 테베역시 무너지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빛나는 전술적 승리’를 거뒀으면서도 ‘전략적 패배’는 막지 못했던 것이다. 손자가 싸우지 않고 승리를 거두는 ‘부전승’을 최고로 꼽은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강력하게 군을 육성하고 뛰어난 지휘관들로 하여금 전쟁을 치르게해 승리했다고 해도 스파르타와 테베의 경우처럼 국가가 위태로워지기도 하는데, 하물며 중견국이나 약소국이라면 지도층이 엄청난 결기로 외교안보 역량 강화에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역사적으로도 강화도 조약이후의 조선은 주변 강대국들이 으르렁 거리고 있는데, 지도층이 국가안보를 소흘히 하고 이리저리 줄타기를 하며 무능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이 땅의 민초들은 양경종처럼 원치 않는 전쟁에 끌려다니며 언제 끝날 줄 모르는 비극 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 뿐인가. 일본군 위안부로 온갖 고초를 치러야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고통은 21세기에 들어서도 현재진행형이다.

이게 바로 역사의 교훈을 끊임없이 되새기면서 현재의 외교안보 정책은 과연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또 점검하면서 효율적으로 역량을 강화해 나아가야할 분명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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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금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