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고형석 기자가 작성한 KBS 뉴스 [울지마 키이우]③ 러-우 전쟁에 드리운 남북의 그림자 [취재후]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부차 광장에 펼쳐진 태극기
부차(Bucha)는 개전 초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가장 신속하게 점령한 도시 중 하나다. 벨라루스에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로 가는 길목인데 러시아군은 여기서 주민을 천 명 넘게 학살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끔찍한 학살이 이뤄진 부차를 찾은 취재진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태극기였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도록 우크라이나를 지원한 나라들의 국기들과 나란히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러우전쟁에서 남북한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게양된 국기들에서 알 수 있듯 나토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들은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다. 반면, 중국과 이란은 러시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각각 지지하는 또 다른 당사자는 한반도의 남과 북이다.
한국의 우크라이나 지원과 북한의 러시아 지원
한국은 러우전쟁에서 어느 편에 서 있을까?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 이후 한국 정부는 2022년 1억 달러, 2023년 5천만 달러, 2024년에 3억 달러 이상의 지원을 했다. 올해부터는 향후 5년간 우리 기업이 우크라이나 인프라 및 산업 시설 재건에 기여할 수 있도록 20억 달러 규모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한국 정부는 '살상 무기는 지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2023년, 서방의 군사 지원이 약화된 가운데 미국 역시 우크라이나 지원으로 포탄이 부족해지자 한국은 미국에 155mm 포탄 33만 발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러시아 지원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그러나 아직까지 우크라이나를 인도적 또는 간접 지원하는 한국과 달리 북한은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포탄 및 살상 무기를 직접 지원하고 있다. 2024년 6월, 평양을 방문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고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에 서명하면서 북한의 러시아 지원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지난해 10월, 국정원은 북한에서 러시아로 컨테이너 1만 3,000여 개 분량의 군수물자가 수송되었다고 발표했다. 국정원은 북한에서 러시아로 지원된 포탄이 800만 발이 넘는다고 파악하고 있다.
키이우에 떨어진 북한제 미사일의 충격
러우전쟁에서 북한 무기의 실상은 어떨까?
지난 12월 20일, 취재진이 묵고 있던 숙소에서 불과 1.5km 떨어진 키이우 중심가에 탄도미사일이 날아와 호텔과 은행, 대형 주상복합 건물은 물론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6개 외국 공관 등이 파괴되거나 큰 피해를 당하였다. 이 날 우크라이나 공군은 미사일이 러시아제 이스칸데르 미사일 또는 북한제 KN-23 이라고 발표했다. KN-23은 이스칸데르를 모태로 개발된 것이어서 이른바 '북한판 이스칸데르'라고도 불린다.
분명한 것은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에서 날아오는 탄도미사일 상당수가 북한제일 것으로 추정한다는 것이었다.
북한군 파병이 바꾼 러우전쟁의 판도
북한의 러우전쟁 개입은 어디까지일까?
우크라이나와 서방 국가들은 북한이 대규모 무기 지원과 함께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러시아에 파병해 격전지 쿠르스크주에서 우크라이나 군을 압박하고 있다고 본다. 한국 국정원은 지난해 11월 국회 정보위에 북한군 만 천여명이 쿠르스크로 이동 배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은 심지어 땅굴 파는 기술까지 지원해 아우디우카 전투 등에서 러시아군이 공격용 터널을 파는 데도 도움을 준 것으로 우크라이나와 서방 정보기관들은 파악하고 있다. 북한군이 전세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군에게 전략적 활로를 열어 주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러우전쟁과 한국전쟁의 놀라운 유사성
러우전쟁이 제2의 한국전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와 중국에 가까운 북한은 이들 국가의 지원 속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개전 초기 북측은 광공업이 발전해 있었고 전력 사정도 훨씬 좋았다. 탱크조차 없던 국군에 비해 북한군은 남측에 비해 압도적인 화력을 보유했다.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 점령하고 있는 돈바스 주 등은 북한처럼 탄광이 많아 광공업이 발달한 곳이다. 우크라이나보다 훨씬 많은 탱크와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던 러시아군이 개전 초반 신속히 진격해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려고 한 것도 한국전쟁 초기 양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은 서방의 지원 속에 북부 전선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남부 전선에서도 러시아군에게 타격을 줬다.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 등 UN군의 지원으로 북한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듯이, 서방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의 반격에 러시아군이 고전하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전선에 큰 변화는 없으면서 마을 하나를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것도 한국전과 유사한 형태 가운데 하나다.
트럼프 시대와 러우전쟁의 미래
러우전쟁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현재 북한군의 참전에 힘입은 러시아군은 다수의 사상자를 감수하고 병력을 거듭 투입하는 인해전술 방식을 쓰고 있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지친 우크라이나군을 러시아 쿠르스크에서 몰아붙이는 성과를 내고 있지만, 러시아 역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다.
곧 공화당 소속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다. 미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취임하면 24시간 이내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언해 왔다. 취임이 가까워지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수위는 조금씩 낮아지고 있으나, 앞으로 우크라이나가 민주당 정부 시절 수준의 지원을 받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한국전쟁 때도 민주당의 트루먼에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전쟁 지원 축소와 휴전에 대한 논의가 가속화됐다.
휴전 후 우크라이나의 불안한 미래
러우전쟁 휴전 후 상황은 어떨 것인가?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대한민국은 미국과 상호방위조약(동맹)을 맺었지만,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은 물론 유럽연합 EU 가입도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전쟁 방식으로 러-우 각자의 점령 위치를 인정하면서 불완전한 휴전을 할 수도 있지만, 나토 같은 군사동맹에 가입하지 못한다면 우크라이나의 전후 상황은 휴전 후 대한민국보다 훨씬 불안정한 상태에 놓일 것으로 보인다.
분단의 그림자가 드리운 유럽의 전장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본 러-우 전쟁은 '남의 전쟁' 같지 않았다. '남과 북의 그림자'가 우크라이나 전역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로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각각 지원하는 남북한을 바라보며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이 유럽의 전장에서 떠올려지는 것은 기묘하고도 씁쓸한 일이다.
러우전쟁은 단순한 유럽의 지역 분쟁이 아니다. 한반도 분단의 현실이 그대로 투영된 대리전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 전쟁의 결과는 우리의 안보 환경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러우전쟁 현장에서 4주간 머물며 우리 취재진이 목격한 것은 단순한 유럽의 지역 갈등이 아니었다. 부차 광장에서 바람에 펄럭이던 태극기,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키이우에 떨어진 북한제 미사일, 그리고 쿠르스크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북한군까지.
27시간의 버스 여행과 매일 밤 울리는 공습경보, 1.5km 거리에 떨어진 미사일의 공포 속에서도 우리가 기록해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러우전쟁은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어쩌면 미래가 될 수도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드론이 바꾼 전쟁의 모습, 4주 만에 양성되는 드론 파일럿, 북한군이 학습하고 있는 최신 전술, 그리고 30년간 지켜지지 않은 안전보장의 약속y까지. 우크라이나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한반도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서 포착한 이 모든 진실, 그리고 그 속에 감춰진 한반도의 운명을 우리 취재진이 다큐멘터리로 담아냈다. 지금 유튜브에서 '우크라이나 임팩트 <제1편> 미래 전쟁의 서막'을 통해 자세한 이야기를 확인해 볼 수 있다.